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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r 상식

맥주의 라벨은 예술이다.

beergle 2020. 6. 9. 14:29

첫 인상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특히 상품에서 첫 인상은 구매와 직결된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여 광고만 하면 잘 팔리던 시기와 달리, 요즘은 모든 장소와 시간이 ‘프로듀스 101’과 같다. 대부분의 상품은 멋진 박스 디자인을 통해 고객이라는 심사위원에게 자신의 프로필과 매력을 어필하곤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품과 달리 선반 위의 술은 맨몸으로 고객을 기다린다. 병위에 붙어있는 라벨만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술의 라벨은 차별적이고 절박하다. 

 

그 중 맥주 라벨은 다른 술에 비해 매우 다양하고 자유롭다. 더구나 병, 캔, 케그와 같이 다양한 용기는 맥주의 라벨 디자인을 마케팅 전쟁터로 만든다. 맥주 라벨은 소비자에게 짧은 시간에 대단히 많은 정보와 무형의 가치를 제공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맥주 소비자에게 라벨은 또 다른 선택 기준이 된다. 브루어리, 향미, 스타일을 잘 몰라도 라벨의 매력에 매료되어 맥주를 구매하고 때로는 병이나 라벨을 소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맥주들이 출시되는 요즘 시장에서 라벨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맥주라벨들 (출처 : 윤한샘)

맥주 라벨은 그 맥주의 전통성, 신뢰성, 정체성, 방향 그리고 심미적 아름다움까지 모든 것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예술과 같다. 단순한 정보 제공자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떠한 제약과 규정이 없는 맥주 라벨을 구분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전통과 크래프트로 구분하여 라벨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맥주를 이해하는 또 다른 재미와 같다.

 

우선, 라벨이 어떤 가치를 보여주든 간에 반드시 지켜야 할 선결조건이 있다. 전통이든 크래프트든 상관없이 라벨이 제공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보는 알코올 도수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하지 않기 위해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은 맥주 라벨의 기본적인 임무라 할 수 있다. 

 

알코올 도수와 상미기한 등 기본적인 정보가 제공되었다면 이제 라벨은 자유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 시작한 것도, 합의한 것도 아니지만 라벨을 통해 전통과 크래프트의 정체성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100년이 넘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맥주에 붙어있는 라벨과 갓 태동한 크래프트 맥주의 라벨은 언뜻 봐도 매우 다르다. 

 

 

뼈대 있는 집안의 힘과 겁 없는 청춘의 패기

전통적인 맥주 라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브루어리의 로고다. 로고는 가문의 성(姓)과 같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통째로 드러내며 전통과 신뢰를 상징한다. 보통 로고 옆에 붙어있는 년도는 그 가문의 시작일을 대놓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아무 맥주나 시작년도를 라벨에 표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로고가 가문이나 성을 의미한다면 맥주 스타일은 계통을 분류하기 위한 족보다. 마치 김씨 가문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등과 같은 구분과 같다. 이들에게 이름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이름이 없이 스타일 구분만으로 각 맥주들의 성격과 정체성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로고와 맥주 스타일 외의 정보는 선택적이다. 전통적인 독일 브랜드들은 맥주 순수령을, 벨기에 맥주들은 자신들의 길드 마크를 넣곤 한다.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는 육각형의 로고를 통해 전통 수도원 맥주임을 자랑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맥주의 라벨에서 깨알같은 홍보는 유치하고 격에 떨어지는 일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 알지? 해평 윤씨 가문의 아들이야’

 

이에 반해 생긴 지 길어야 몇 십년, 짧으면 수년 밖에 안되는 크래프트 맥주에서 가문이나 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체면을 차리는 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다. 

 

크래프트 맥주 라벨에서 중요한 건 이름과 깨알같은 정보다. 창의적이고 튀며, 때로는 도발적인 이름이 정체성을 대변한다. 맥주 스타일도 중요하다. 다양하고 복잡한 스타일이 크래프트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주 스타일은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다. 그것도 모자란 지 화려하고 독특한 옷도 준비한다. 크래프트 맥주의 라벨 디자인은 독립적이고 독특하며 정형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불안한가 보다. 크래프트 맥주 라벨은 자신을 소개할 더 구체적인 정보도 갖고 있다. 쓴맛을 나타내는 IBU와 색깔을 알려주는 SRM, 사용된 몰트와 홉은 물론 첨가된 과일과 향신료와 같은 추가적인 재료의 정보도 보여준다. 배럴에 숙성된 맥주들은 배럴의 종류 뿐만 아니라 어떤 와인과 위스키를 담았던 배럴인지도 ‘깨알’같이 라벨에 나타낸다. 

 

전통적인 맥주와 달리 크래프트 맥주의 라벨은 온몸으로 개성을 드러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수도수라고 해, 노란색을 좋아하고 망고와 오렌지를 사랑해. 키는 186, 몸무게는 80이야. 나 어때? 빨리 잡아!’

 

각맥각벨, 재미있는 맥주라벨들

각 맥주는 각각의 라벨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는 매우 멋지고, 우아하며 창의적인 라벨을 가진 맥주들이 많다. 그 중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맥주 라벨을 소개한다. 

 

바네하임 벚꽃라거

바네하임 벚꽃라거 (출처 : 바네하임)

바네하임 벚꽃라거는 벚꽃이 들어간 라거맥주다. 수년 째 시즈널 맥주로 양조되고 있는 이 맥주의 라벨은 신윤복의 월하정인이다. 원작은 조선시대 달빛이 흐르는 골목길에서 한 남녀의 데이트를 그린 명작이다. 바네하임은 골목길을 겹벚꽃 나무 아래로 바꾸었다. 겹벚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벚꽃보다 크고 아름다운 핑크색을 갖고 있다. 벚꽃라거 라벨은 이 맥주가 한국맥주이며 우리의 정서와 해학을 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슈렝케를라 라우흐비어

 

슈렝케를라 (출처 : 윤한샘)

슈렝케를라는 밤베르크의 전통맥주로 라우흐비어, 즉 훈연맥주의 대표적인 브루어리이다. 1405년에 시작된 슈렝케를라의 라벨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으로 가득하다. 오래된 비문과 같은 디자인에는 ‘Aecht Schlenkerla Rauchbier‘라고 되어 있는데, Aecht는 Original을 의미하며, Schlenkerla는 비틀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리를 살짝 절었던 브루어리의 대표의 모습을 본딴 것이 브루어리의 상징이 되었다. 맥주와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우리는 이 라벨을 통해 이 맥주가 가지고 있는 전통성과 오리지널리티를 함께 경험할 수 있다. 

 

 

플레이그라운드

플레이그라운드 (출처 : 플레이그라운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플레이그라운드의 맥주 라벨에는 전통탈들이 가득하다. 플레이그라운드의 맥주는 이러한 전통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각시탈이 라벨에 있는 ‘미스트레스 사워에일’은 17살에 시집와 3일만에 신랑을 잃은 적적한 각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소해줄 수 있는 사우어 맥주에서 착안하였고, 파계승을 의미하는 중탈이 그려져 있는 ‘몽크 IPA’는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IPA 스타일이다. 라벨이 맥주스타일과 연결되어 재미있고 의미있는 스토리 텔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슈나이더 바이세

슈나이더바이세 (출처 : 구글이미지)

슈나이더바이세는 1872년 사라져가던 바이스비어의 명맥을 이은 브루어리다. 현대적 바이스비어의 아버지로 독일 바이에른 밀맥주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슈나이더 바이세의 라벨은 자신을 상징하는 문양, 브루어리 이름 그리고 창립자인 게오르그 슈나이더의 얼굴이 그려 있다.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변화되고 있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여전히 오래된 가문의 힘을 통해 발산되고 있다. 

 

 

정체성을 넘어 아트워크로

과거 맥주의 라벨은 단순히 맥주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재는 새로운 아트워크로 발전하고 있다. 오프너, 타월, 가방 등 다양한 굿즈들을 위해 고안되고 변형된다. 라벨이 새로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라벨을 통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넘어, 하나의 문화를 즐기고 소비하는 것은 대단히 멋진 경험이다. 공감각적 경험을 라벨에서 느껴보자. 새로운 문화적 전율에 깜짝 놀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