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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eer story

도심 속 맥주양조장, 문화와 재생을 꿈꾸다

beergle 2020. 8. 3. 12:26

동네 한 귀퉁이, 갓 볶은 커피의 향이 그윽하다. 커피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는 다른 느낌을 주곤 한다. 푹 익은 김치로 바로 끓여낸 김치찌개가 더 맛있는 이유와 같다. 

 

맥주는 어떨까? 갓 만든 맥주가 더 맛있을까? 맥주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맥주의 맛은 신선도와 상관관계를 갖는다. 신선한 맥주가 더 맛있다. 하지만 동네 로스터리 카페, 노포 김치찌개는 우리에게 단순한 맛 이상의 가치를 전달한다. 이는 동네 맥주 양조장도 마찬가지다.

 

독일이나 체코와 같은 나라를 가면 동네 맥주 양조장을 흔히 볼 수 있다. 밤베르크의 슈렝케를라, 쾰른의 가펠, 하이델베르크의 베터 같은 곳은 단순한 맥주 양조장이 아닌, 그 지역 공동체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이 곳에서 지역 사람들은 우리 동네 맥주를 마신다는 자부심 외에 다른 의미를 갖곤 한다. 동네 맥주 양조장은 맥주의 맛을 뛰어 넘는, 무형의 가치를 품고 있는 공간이다. 

 

도시에 맥주 양조장이 있다.

우리나라 도심에 소규모 맥주 양조장이 생긴 건 2002년 이후이다.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다양한 맥주를 선보이고자 소규모 맥주 양조장을 위한 주세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양조된 맥주와 음식을 같이 즐길 수 있는 브루펍(Brewpub)이 합법화되어 도심 속 맥주 양조장을 대표하게 되었다. 하우스 맥주로 불렸던 브루펍은 높은 세금과 맥주의 외부유통 금지로 인해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사그라 들었다. 

 

새로운 흐름을 맞은 건 2014년 이후, 소규모 양조장 맥주의 외부유통이 허용되면서 부터다. 또한 2010년 대 들어 시작된 수입 맥주의 붐은 미국 크래프트 맥주를 대중에게 소개했고 다양한 맥주를 적극적으로 즐기고자 하는 소비자들과 새로운 시장성장성에 대한 전망은 브루펍을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다. 

 

카브루 (출처 : 윤한샘)

신생 브루펍들은 기존과 달리 맥주의 이름과 스타일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다. 바로 지역 정체성이다. 다품종 소규모 생산을 통해 각각의 맥주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지역민과 소통하기 위한 마케팅을 하는 등 그간 한국 맥주 산업에서 볼 수 없었던 로컬리티(locality)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브루펍에서는 프리미엄 이외에 다른 가치를 찾기 힘들었던 반면, 지금은 정동맥주, 성수맥주, 서울맥주, 울산맥주, 강릉맥주 등 지역 정체성과 문화를 고려한 이름과 재료 그리고 스타일들이 도시의 작은 양조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작은 맥주들은 매스 마켓(mass market)을 대상으로 하는 대형맥주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가치를 형성하고 지역 사회 공동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지역문화를 대표해 온 유럽 맥주와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미국 크래프트 맥주처럼 우리 맥주도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 넣게 된 것이다. 

 

도심 속 맥주양조장, 도시를 리뉴얼 하다.

미국 크래프트 맥주는 도시 재생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는 물론 플로리다 잭슨빌, 뉴잉글랜드 메사츄세츠의 작은 도시들에서도 맥주를 통해 도시가 정비되고 지역이 활성화된 예들은 수도 없이 많다. 

 

예를들어 잭슨빌과 같은 도시는 소규모 맥주양조장과 펍을 도심재생 활성화 사업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이후, 범죄율이 낮아지고, 버려졌던 항만의 창고와 공장들이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지역민 뿐만 아니라 외부인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미국의 도심 속 맥주 양조장들은 지역 문화를 상징한 공간 인테리어와 지역 정신을 담은 맥주를 출시하고 판매하여 무형의 문화를 실체적이고 상업적인 결과로 만들어냈다. 그동안 우리가 추진했던 도심 재생 사업이 실체가 불분명했던 것에 반해, 이들이 추구한 도심 속 맥주사업은 분명하고 명징한 사업적 실체를 제시한다. 

 

실제 맥주 양조장 클러스터는 긍정적인 외부효과를 만들어 지역 사회에 활기를 공급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바로 부산이다. 가장 선구적인 크래프트 맥주 문화를 이끌고 있는 부산은 구포의 오래된 도심을 맥주를 통해 활성화 시키는 ‘밀당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9년부터 부산 북구 구포에 밀당 브로이를 설립하고 올해 구포 밀맥주를 출시하여 도시 재생 사업에 맥주가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실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밀당브로이 구포만세329 (출처 : 부산 북구청)

도심 속 맥주 양조장, 지역 문화를 만들다.

지금까지 지역 문화 사업은 지역 특산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역 특산물은 대중들에게 지리적, 심리적 거리감은 물론, 차별성 측면에서도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해 맥주는 지역 정체성을 담은 문화를 실체화 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맥주는 대중에게 친숙한 상품으로서 지역 정신과 특산물이라는 유무형적 요소를 함께 담아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스토링 텔링은 지역 문화를 만들고 내재화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준다.

 

맥주인문학 강연 (출처 : (사)한국맥주문화협회)

뿐만 아니라 도심 속 맥주 양조장은 지역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자신들의 삶을 공유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자신들의 문화를 소비할 수 있고,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실체적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지역 맥주 양조장에게도 이는 핵심가치 중 하나로, 작은 양조장의 생명력은 지역 사람들의 지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아직 이러한 것들을 지역의 문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소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꾸준한 관심과 노력은 분명 지역 맥주 양조장을 지역 공동체의 소통 공간 뿐만 아니라, 문화 이벤트 공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편익 공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도심 속 맥주 양조장, 새로운 음주문화를 만들다. 

좋은 음주문화는 술이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때 만들어진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짧은 압축 성장기로 인해 좋은 음주문화를 갖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알콜성 음료였을 뿐, 그 안에 사람과 공동체는 없었다. 술은 집단문화를 개인에게 강요하고, 노동의 고통을 빨리 잊게 하는 수단에 가까웠다. 이런 문화는 다양성과 소통이 중요한 지금의 시대정신과는 맞지 않다.

 

새로운 시대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잘못된 음주문화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할 때다. 사람과 공동체적 가치를 중심에 두는 음주문화가 필요하다. 맥주는 소통을 위한 좋은 매개체이기 때문에 도심 속 맥주 양조장은 이러한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도심 속 맥주 양조장이 제공하는 공간과 맥주로 세대 간 자유로운 소통이 만들어지며 술 자체보다 사람 간 관계에 집중하는 음주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후진적 문화를 없애는 물리적 장소가 되어야 한다. 

 

메가시티 서울 속 맥주 양조장들

서울은 이제 코스모폴리탄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찬사를 보내는 곳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국제 도시가 되어가는 서울에도 지역문화와 정체성을 맥주로 빚어내는 작은 양조장들이 존재한다.

 

 

*미스터리 / 서울 공덕동

 

미스터리 양조장 (출처 : 윤한샘)

미스터리는 마포구를 대표하는 브루펍이다. 미스터리의 이승용 대표와 이인호 대표는 한때 비어포럼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국내 크래프트 맥주의 확산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 온 인물이다. 미스터리는 매우 트렌디하고 다양하며 실험적인 스타일을 선보인다. 모던한 인테리어 속에 양조장과 레스토랑이 멋지게 어우러져 현대 도시의 세련됨을 느낄 수 있다. 트렌디한 맥주와 문화를 즐기는 회사원들과 다양한 서울시민을 만날 수 있다. 

 

 

*독립맥주공장 / 서울 정동

정동독립맥주공장 (출처 : 윤한샘)

덕수궁 돌담길 끝자락에 있는 작은 브루펍. 프란시스코 성당과 각국 대사관 사이에서 정동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맥주를 만들고 있다. 정동IPA, 이화세종 등 맥주 스타일에 정동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근대 역사를 상징하는 오얏꽃을 상징하는 인테리어로 지역문화와 소통하고 있다. 

 

 

*바네하임 / 서울 공릉동

 

 바네하임 (출처 : 시사매거진)

2004년부터 서울 공릉동을 지키고 있는 브루펍. 1세대 맥주 양조장으로 16년째 지역을 대표하는 맥주를 만들고 있다. 지역민을 위해 마시기 쉽고 편한 맥주를 지향하며 합리적인 가격을 고수하고 있다. 트랜디한 스타일을 따르기보다 꾸준히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스타일을 추구한다. 프레야와 노트는 16년째 지역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맥주들. 

 

 

*슈타인도르프 / 서울 방이동

 

슈타인도르프 (출처 : 슈타인도르프 페이스북)  

방이동에 위치한 슈타인도르프는 석촌을 상징하는 브루펍. 순수 우리말인 ‘돌마을 양조장’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독일 정통 스타일을 지향하며 튀지 않고 누구나 좋아하는 맥주를 만들고 있다. 별칭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문화를 맥주에 담고, 이를 통해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꾸준한 캠페인을 하고 있다. 돌마을 양조장에서 보는 잠실의 풍경은 또 다른 안주거리.

 

 

맥주의 다양성을 창조적 문화의 토대로 

 

여러 계층과 문화가 뒤섞여 있는 도시는 복잡하지만 다양성이 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도심 속 맥주양조장은 이러한 다양성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문화적 공간과 같다. 그리고 고단한 인생을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쉼터이기도 하다. 

 

창조, 융합 그리고 소통과 여유, 공정성 등 대한민국 사회와 구성원이 만들어가야 할 보편적 가치에 맥주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도심 속 작은 맥주 양조장은 분명 작지만 큰 역할을 할 것이다.